며칠 전 일이다. 답추가 끝나고 이취泥醉한 돌욕은 오랜만에 자유인으로서 단잠을 잤다. 새벽녘에 목이 말라 잠이 깨 보니 자신이 한 게르 안의 호사스러운 침상위에 누워있었다. 충실한 강다린과 살갈은 게르 앞에서 곰 가죽을 깔고 덮고 하여 튼튼한 사지를 쭉 뻗어 누구든 자기들을 깨우지 않고는 어재소御在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를 가로질러 누워있었다. 그것은 온몸을 던지는 충성스러운 숙위들이 취하는 동작이었다. 여울로 소금 섬을 끌어라 해도 기꺼이 끌 사람들로 돌욕을 존경하면서도 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최측근들이다. 사흘을 빈둥거리며 휴식을 취하자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제는 여행자가 겪는 객창감客窓感이 밀려오는 게 아닌가.

유정과 문희는, 고정임이라는 고혹적인 여인과 비교될 때는 박제된 미인이라고 해야 된다. 돌욕은 근본이 피와 살이 펄펄 뛰는 야성의 유목민이다. 두 왕비는 초원에서 짐승과 함께 생활하는 건장한 남자의 심리의 근저에서 한 번씩 솟는 야수적인 욕정을 여과 없이 달래 주는 데는 아무래도 미흡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성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두 여인 모두 이지적인 면이 강한데다 세상 사람들이 일국의 왕비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요조숙녀로서의 체면 때문에 정염에 몸을 맡기기엔 거치적거리는 것이 많아서 일 것이다. 물론 그 대신으로 두 왕비 모두 돌욕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다.
 

그러나 특히 돌욕에게는 그가 제위를 포기한 이래로, 현숙한 아내로서 보다는 성적인 상대자로서의 여성을 자신도 모르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 번씩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격렬한 분노의 감정을 삭여주고, 어머니의 사랑을 잃어버린 자만이 느끼는 허함을 메우기 위해 모성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면서도, 남성의 빗나간 맹목적인 육욕의 몸부림까지 받아줄 여인이 필요했다. 돌욕은 고정임의 눈동자와 춤을 떠 올릴 때마다 한번쯤 자신도 온갖 제약에 벗어나 원초적 욕망에 몸을 내맡겨버리고 싶었다. 제왕의 배꼽 아래 일은 무치無恥라는데 천복성과 요양성에 궁녀를 해산시켜 버린 게 후회가 되기도 했다. 아마 이래서 통치를 망친 황제는 주지육림에 빠지는가? 돌욕이 보기엔 경국지색이라고 비난받던 미인은 무죄다. 구중궁궐에 갇힌 그녀들이 도대체 무얼 알았겠는가. 군주들의 몰락과 죽음은 남자들 사이의 욕망의 충돌, 기만과 배반, 모욕과 반항이 가져온 결과였을 뿐이다. 주지육림에 빠져 백성은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그런 군주를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한 그녀들은 오히려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나라를 망친 군주는 이미 자신만은 국가의 존망이 걷잡을 수 없어 곧 해체될 것이라는 걸 다 알고 있으므로. 그 죄업을 한 여인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자신은 ‘본성은 착하고 현명한 제왕인데 어쩌다 여인에게 빠져서 나라를 망친 아까운 황제’라는 백성들 혹은 역사가들에게 애석함을 듣는 것을 최고의 위로로 삼기위해서일 거다.
 

드디어 돌욕의 고정임에로의 끌림이 두 사람 사이가 다시 소통된 모양이다. 상금이라고 밝힌 고정임의 시녀로부터 정임이가 지은 시 한편과 물 소뿔 장식죔쇠가 있는 허리띠가 선물로 돌욕에게 전달된 것이다. 서신은 봉투에 넣어졌고 입구는 입맞춤한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슬람교 전파 이전 강대국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의 귀족 부인들이 패전국에서 잡아온 귀족 출신의 훤칠한 용모에 강건한 몸집을 하고 뛰어난 지성을 갖춘 그러나 이제는 노예가 된 남성에게 보낸 노골적인 사랑의 고백 편지를 떠올리게 했다.

사연은 대강 이러했다. 당신의 ‘구도의 춤’에 자기는 완전 매료돼서 지금 이것저것 체면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한 여인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수습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 아예 천막을 치고 드러눕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마음으로만 불타는 이 사랑은 조바심치다 목숨을 잇기조차 어렵다. 이 몸을 목매단 사람의 버둥대는 발로 만들 것인지, 그대를 얻어 환희에 젖어 전보다 더욱 진전된 ‘감각의 춤’을 추는 백조의 우아한 발로 만들 것이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작가 : 김산
작가 : 김산

이건 숫제 목을 매겠다는 협박조이다. 그러다가 다시 상사병에 걸린 한 여인의 가련한 팔자를 구원해 달라는, 숫제 애원조의 구절이 덧붙여져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는 도발적인 연서戀書였다. 그것은 사춘기의 남녀가 주고받는, 긴 밤 지샌 연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그 유치한 문장의 육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사적이고도 은밀한 욕망과 미묘한 번민이 번져 나오는 평범한 연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의 편지는 두 사람의 불꽃이 얼마나 강하게 튀고 오래 지속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는 투의, 날것 그대로 거칠 것 없이 바로 내뱉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그녀는 돌욕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이 고정임이라는 여인은 ‘감각의 춤’을 벗어나, ‘구도의 춤’을 거쳐 ‘신 앞에서의 춤’으로, 더 나아가 우주의 정지 점에서 오직 영靈만이 충만한 ‘신의 춤’까지 추고 싶은데, 자신의 한계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니, 감히 신안神眼까지는 아니더라도 탁운거사께서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을 열게 지도해 달라는 맹랑한 추신으로 끝을 맺었다.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 싶다 이건가? 도대체 어떤 여자지? 꿈도 야무지군 그래, 발칙한 매력이 있어, 하하하!”
 

그녀는 고구려 여인의 펄떡이는 심장을 돌욕에게 바로 대밀었다. 연서의 배달도 거란 기마군단이 선호하는 기습돌격으로 밀어붙였다. 돌욕은 자리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보낸, 정력제로도 최고이지만, 진실을 향해 묵묵히 정진한다는 물소 뿔로 만든 허리띠 죔쇠가 그 속에 들어있는 실오리 같은 백색 각수角髓가 상대를 꿰뚫어 보는 영험한 기운을 일으켜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한 모양이다. 다시 말해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읊은 대로 “영서각靈犀角이 맘에 있어 기맥이 통했다[心有靈犀一點通]”인가?
 

이제 남은 것은 피를 뿜는 듯한 열정을 호소하다 사랑의 앓음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고정임을 이쪽에서 급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붉은 심장에 손을 얹고, 자신의 새빨간 날 심장 한 곽을 내밀면 상황 끝이다. 이미 체면치레로 하는 가식의 말을 걷어치워 버리고 바로 정곡을 찌르는 행동을 하는 그녀는 과연 누구인가? 돌욕은 이곳 아버님의 궁장 터에서 칠흑의 어둠을 뚫고 자신에게 유혹의 눈을 쏘았던 여인이 고정임이 맞을 거라고 이제는 확신했다. 어쩌면 의무려산의 자각몽에서 자신을 구원하려는 아버지의 계시를 할머니가 전달해준 것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다시 탁 트인 평평한 풀밭으로 나왔다. 풀밭 맞은편에는 완만한 경사지가 있고 거기로부터 불쑥 솟아있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비바람에 시달린 회색 전면을 일행에게 들이밀고 있다. 바위 옆면 여기저기와 울퉁불퉁한 바위 절벽에는 중키 정도의 전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용케 버티고 서 있다. 전사의 강철 투구 위를 장식한 깃털처럼 보기만 해도 무서운 모습이지만, 저 나무들은 이상한 운치를 더하며, 아래로 펼쳐진 절벽 위로 가지를 흔들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언뜻 보기엔 담자리꽃나무 같은 작은 관목이 빽빽하게 흰 꽃을 피우고 있다. 바위 밑동에는 비스듬히, 말하자면, 바위에 기대어, 자작나무를 이용하여 삼각형 집인 촬라자撮羅子[귀틀집]가 한 채 서 있다. 그것은 정교한 기술이나 도구 없이 통나무를 정井자형으로 귀를 맞추어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굴피로 지붕을 이은 집이다. 풍우에 견딜 수 있게 튼튼하게 지었을 뿐 아니라 숲의 경치와 어울리면서도 꽤 실용적으로 보였다. 담장을 대신한 생나무 울타리에 내어놓은 사립문을 열고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 없었다. 상금이가 돌욕만을 모시고 다시 오솔길을 따라 그녀가 운동을 하고 있다는 별처別處로 안내해 주고는 사라졌다. 그곳은 소나무 판자로 담이 둘러쳐져 있는 상당한 크기의 운동장이었다. 안에서 한 여인이 내지르는 구령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정말 진지하게 들려서 판자문을 열면 모처럼 달궈진 그녀의 열기가 식을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마침 울타리용 소나무 널빤지에는 관솔 부분이 떨어져 나간 큰 옹이구멍이 하나 나 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돌욕은 바로 그곳에 한 눈을 들이댔다. 이미 출발 때부터 마음이 상기돼, 이런 일에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왕의 체면 같은 것은 던져버리고 얼굴을 두껍게 하려고 작심을 했던 그였다. 구멍 속으로 늘씬한 한 여인이 돌욕의 눈에 확 들어왔다. 여인은 몸에 착 달라붙는 아마포로 짠 체조용 분홍 바지에, 등과 팔이 거의 노출 된 상의를 입고 날렵하게 맨손체조를 하고 있다. 축제 때 그녀가 걸쳤던 의상과는 단지 색깔만 흰색에서 분홍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버님 궁장 터에 제의를 지내던 그 여인! 그녀가 바로 고정임이었구나.”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온 몸의 부드러운 곡선이 만지면 터질듯 탄력 있게 움직이고 있다. 가슴 부근은 몸놀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옷을 조금 헐렁하게 열어놓아 그 속에는 깊은 가슴골을 가진 탄력 있는 젖무덤이 출렁거렸다. 갠 날의 수분 냄새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지금까지도 눈앞에 삼삼한 첫 만남 때의 삼나무 같은 늘씬한 키, 페르시아 처녀 같은 아몬드 눈, 복숭아 같은 발그레한 두 젖가슴이 아른거렸다. 특히 두 가슴 때문에 깊이 파진 골짜기가 한 번씩 언뜻언뜻 보일 때, 그는 사람을 호리는 그녀의 호선무를 떠 올렸다. 돌욕의 마음은 그 보다 더 앞섰는지 그녀의 두 다리 사이의, 약간 부드럽게 둔덕을 이루며 부풀어 오른, 아래의 더 큰 골짜기에 더 깊고 더 붉게 핀 도화가 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목이 타들어갔고, 아래가 뻣뻣해 오는 아픔을 느꼈다.
 

내 몸속에서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어, 내 마음의 착함과 싸워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고 있구나.”
 

그의 얼굴에는 이미 본능의 혼신이 덮여버렸다. 그는 눈앞을 마비시키는 육욕의 세계인 색色에서 거문고 선線 같이 팽팽하게 감시하고 있던 계戒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거칠고 발가벗은 본능으로 바로 떨어졌다.

저작권자 © 아시아씨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